더불어 민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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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2003~2008 대한민국 제 16대 대통령 노무현
노무현

대한민국 16대 대통령

1946년 9월 1일 경남 김해 진영 봉하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재직하다가 인권변호사가 되어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 1988년 국회의원에 당선돼 정치에 입문한 뒤 제5공화국비리조사특별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청문회 스타’로 떠올랐다.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 ‘작은’ 민주당 창당에 동참했다. 야권통합을 주도해 통합민주당 대변인이 되었다. 1992년 14대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낙선하고, 1995년 부산시장 선거에 출마해 역시 고배를 마셨다. 1998년 서울 종로구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당선됐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높은 종로구에 출마하지 않고, 지역감정의 벽을 넘겠다며 다시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했다. 이로 인해 ‘바보 노무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고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가 탄생하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2002년 국민경선에서 ‘노풍’을 일으키며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16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재임 시절 권력을 국민에게 돌려주고, 탈권위주의, 참여, 자율, 분권의 리더십으로 국정 전반을 개혁했다. 특히 국가균형발전을 강조하면서 행정도시, 혁신도시 건설을 추진했다. ‘비전 2030’을 발표하는 등 국가장기발전전략을 세우는 데 힘썼다. 2007년 평양을 방문, 2차 남북정상회담을 열고 10.4선언을 발표했다. 2008년 2월 25일 퇴임과 함께 역대 대통령으로는 처음 귀향했다. 주민들과 함께 친환경생태 중심의 살기 좋은 농촌마을 만들기에 정성을 쏟았다. 2009년 5월 23일 고향 봉하마을에서 서거했다.

출생

까마귀가 먹을 것이 없어 울고 돌아간다는 봉하마을

노무현은, 1946년 8월 6일(음력) 경남 김해시 진영읍으로부터 10리쯤 떨어진 본산리 봉하마을에서 농부인 아버지 노판석(盧判石)씨와 어머니 이순례(李順禮)씨의 사이에서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봉화산과 자왕골을 등에 지고 있는 이 마을에서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으며, 막내인 데다가 재주도 많아 집안의 사랑을 받으며 자라났다.

태몽

“백마가 말뚝에 매어 있는데, 할아버지가 고삐를 주면서 타고 가라 했다.
엄청나게 큰 말이 말굽을 내딛는 소리가 우렁찼다.”
(어머니 말씀)

유년과 학창시절

가난을 딛고 서는 시골소년의 꿈

초등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가난으로 인한 열등감에 시달리기도 했으나, 공부도 잘하는 편이고 성격도 명랑한 편이었다. 초등학교 시절의 일화로는 교내 붓글씨 대회에서 편파적인 운영으로 1등상을 놓치게 되자 이에 대한 항의로 시상식날 2등상을 반납하여 선생님으로부터 혼이 난 일이 있다. 5학년 때는 선생님의 권유로 학생회장에 출마해 전교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중학교 1학년 때는 ‘우리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작문에 대해 ‘백지동맹’을 주도했었다.졸업한 뒤에는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장학금을 받기 위해 부산상고에 진학했다.

“6학년 때 ‘하면 된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전교회장 선거에 나가 당선되었다.
이 경험이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을 갖게한 계기가 됐다.

사법고시 합격

유년시절의 꿈이 현실로

어린시절부터 고시를 공부하던 큰형님의 영향을 받아 고시에 막연한 꿈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작은 회사에 취직을 했지만 변변치 않은 대우에 실망, 고향에 돌아가 고시공부를 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1966년 10월, 고졸 출신에게 응시 자격이 주어지는 ‘사법 및 행정요원 예비시험’에 합격한 것을 시작으로 사법고시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책값을 벌기 위해 울산에서 막노동을 하기도 했다. 실제로 공부를 한 것은 군대를 갔다 온 다음인 71년 5월경부터다. 1975년 제17회 사법고시에 합격해 2년간 연수원 생활을 거쳐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되었고, 1978년 변호사로 개업했다.

“사시 예비(자격)시험부터 준비했는데, 책 살 돈이 없어 결국 울산 공사판에 나갔습니다.
‘함바’에서 가마니를 깔고 자며 받은 일당은 180원, 공치는 날이 많아 밥값도 모자랐습니다.”

군대와 결혼

고향 처녀를 만나 이룬 사랑과 결혼

사법고시를 준비하던 중에 군대에 갔다 오고 결혼도 했다. 그 기간 중에 믿고 따르던 큰 형님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시기도 했다. 1968년 군에 들어가 전방 을지부대에서 복무하고 1971년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복무 시절 원주 사령부에 있다가 전방부대에 자원했다. 그리고 고시공부 중이던 1973년 1월, 고향마을에서 같이 자라면서 알고 지낸 권양숙씨와 연애결혼을 했다.

“남들이 갖기 어려운 아름다운 추억도 있습니다. 몇 킬로미터나 이어지는 둑길을 걸으면서 밤이 이슥하도록 함께 돌아다녔습니다.
늦여름 밤하늘의 은하수는 유난히도 아름다웠고, 논길을 걷노라면 벼 이삭에 맺힌 이슬이 달빛에 반사되어 들판 가득히 은구슬을 뿌려 놓은 것만 같았습니다. 동화속의 세계 같은 그 속을 거닐며 아내는 곧잘 도스토예프스키의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습니다.”

인권변호사

인생의 전환점이 된 부림사건

전두환 정권이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대표적인 사례가 부산의 ‘부림사건’이었다. 서울의 ‘무림사건’, ‘학림사건’과 마찬가지로 군사정권에 저항하려는 자들에 대한 예비검속이자 조작사건이었다. 노무현은 이 사건의 변론을 맡으면서 행방불명된 자식을 찾는 어머니의 모습, 고문으로 인한 학생들의 상처를 보았고 외면하지 못했다. 이후 시국사건, 노동 관련 사건 등 인권변론에 열중했다.

“바르게 살아야겠다. 비겁하게 살지 않겠다고생각했어요. 그 뒤로 요트를 타던 것도 아예 그만두었고, 잘나가던 조세 전문가의 길도 접게 되었죠. 그때 얻은 별명이 지금도 자랑스러워하는 인권변호사 ‘노변’입니다.”

6월민주항쟁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

1984년 발족된 ‘공해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고, 1985년에는 송기인 신부를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나서는 한편 ‘노동법률상담소’도 차렸다. 1986년경부터는 변호사 업무에 손을 떼다시피 하고 운동에 전념해 1987년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으로 6월항쟁의 주역이 되었다. 사람들은 그를 ‘부산민주화운동의 야전사령관’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해 9월 대우조선 노동자 이석규씨가 파업 중 거리시위를 나왔다가 경찰의 최루탄을 맞고 사망하자 노동자들의 요청으로 진상규명, 유족들에 대한 보상 문제 등을 도왔다. 이것이 문제가 돼 제3자 개입과 장례식 방해 혐의로 구속됐다가 23일 만에 구속적부심으로 풀려났다. 부산지역 개업 변호사가 100명을 조금 넘던 시절 99명의 변호사가 선임계를 내 화제가 됐다.

“1985년에는 송기인 신부님 중심으로 ‘부산민주시민협의회’를 만들면서 재야운동에 직접 나서게 되었습니다. 지원하다가 운동가가 된 셈입니다.”